자산어보 흑백의 바다에 담긴 사람의 향기
눈부시게 푸른 바다가 아닌, 고요하고 단단한 흑백의 바다가 펼쳐진다. 영화는 색을 덜어낸 대신, 인물의 표정과 바람의 결을 더 깊이 새겨넣는다. 유배된 학자 정약전과 섬마을 청년 어부 창대. 이 둘은 신분과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지만, 서로를 통해 삶의 지평을 넓혀간다. 정약전은 책과 학문을 품었지만, 현실을 바꾸지 못한 지식인이었고, 창대는 세상의 이치를 몸으로 익혔지만,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처지였다. 영화는 이들이 함께 어류를 기록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삶의 무게와 의미를 교차시킨다. 이준익 감독은 대사보다 시선에, 설명보다 침묵에 집중한다. 흑백이라는 시각적 선택은 시대적 배경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이자, 그 시대에 놓여 있던 인간의 조건과 질문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흑백 화면으로 펼쳐지는 바다는 그 자체로 담담하고 고요하다. 이준익 감독은 색을 걷어낸 대신, 그 안에 감정을 더 짙게 새겨 넣는다. 찬란한 풍광 없이도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은 바로 사람들의 숨결과 말 없는 시간 속에 있다. 유배지 흑산도, 바닷바람 속에서 살아가는 어부들과 그곳에 낯선 학자로 도착한 정약전. 그들의 만남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시작된다. 화려한 음악이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결이 자연스럽게 쌓인다. 바다는 그저 배경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기능한다. 화면을 채우는 물결, 바람, 침묵은 모두 말이 되고, 그렇게 흑백은 오히려 더 많은 색을 마음에 남긴다.
배움의 길 위에서 마주한 진심
처음엔 서로를 경계했다. 정약전은 창대를 가르치려 했고, 창대는 배움 속에서 계급의 냄새를 느꼈다. 하지만 점차 그들 사이에는 상하가 아닌, 평등한 질문과 답변이 오가기 시작한다. 바닷가 바위에 앉아 물고기를 관찰하고, 삶의 방식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지식의 교환이 아니다. 그건 각자의 신념과 고단한 현실을 꿰뚫는 사유의 흔적이다. 영화는 이 둘의 관계를 사제지간으로 고정하지 않고, 상호적이고 유동적인 감정선으로 그려낸다. 배움이라는 것은 일방적 전달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이해는, 진심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식보다 사람을 본 정약전, 신분보다 마음을 본 창대. 그들이 함께 쌓아 올린 시간은 곧 ‘자산어보’라는 기록이자, 하나의 삶이었다.
정약전과 창대의 관계는 단순한 스승과 제자의 구조를 넘어서 있다. 처음엔 가르치려 했고, 배우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서로의 진심을 알아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점점 마음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창대는 지식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워가고, 정약전은 창대의 질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서로 다른 출발점에 있었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이 영화가 전하는 배움이란 지식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책 한 권보다 깊은 사람의 마음, 가르침보다 오래 남는 교감. 그것이 두 인물 사이에서 피어난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배움은 결국 ‘삶’을 가르쳐준다.
지식은 기록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약전이 남긴 『자산어보』는 단순한 생물학적 분류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생명을 바라보는 태도의 기록이다. 영화는 이 책을 완성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그 목적은 책이 아니라 그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여정에 있다. 물고기의 습성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면서, 두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지식의 진짜 쓰임을 고민한다. 기록은 누군가의 머리 위에 올라서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삶에 다가가는 방식이어야 함을 영화는 일깨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향한 학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학문과 삶의 거리를 좁히고자 했던 정약전의 철학을, 창대와의 교감을 통해 현실에 녹여낸다. 그렇게 완성된 『자산어보』는 단순한 책이 아닌, 세대를 넘어 살아 숨 쉬는 질문이 된다.
정약전이 바라본 학문은 책상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물고기의 습성, 조수의 흐름, 민초들의 노동에서 배우려 했다. 창대와 함께 물가에 나가 어류를 조사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은 단순한 사전 작업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일과 다름없었다. ‘자산어보’는 그래서 단순한 도감이 아니다. 백성을 위한 기록이며, 현실을 직시한 지식인의 몸부림이다. 영화는 이 기록의 가치를 조용히 강조한다. 말보다 눈빛으로, 정보보다 태도로. 정약전이 학문에 담고자 했던 건 우월함이 아니라 공감이었고, 창대와 나눈 시간 속에 그 철학은 더욱 또렷해졌다. 지식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며, 살아 있는 것과 함께 숨 쉬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