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묵은 맛이 자극이 되는 순간
살다 보면 아무 의욕도 들지 않는 날이 있다. 누워 있다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무기력한 날. 그런 오후, 부엌 문을 열고 냉장고 안을 들여다본다. 오래된 김치가 유일하게 반겨주는 그 안에서 묘한 위로를 받는다. 너무 익어버린 듯한 신냄새가 오히려 오늘 같은 날엔 자극이 된다. 자투리 채소 몇 개, 남은 밥 한 공기, 그리고 묵직한 프라이팬만 있다면 시작할 수 있다. 기름을 둘러 강한 불에 달군 후, 큼직하게 썬 재료들을 한데 넣고 볶아낸다. 시큼했던 향이 고소함으로 바뀌는 순간, 공간이 조금 따뜻해진다. 숨죽인 냉기가 가득했던 주방이 조금은 사람 사는 냄새를 품는다. 먹기 좋게 볶은 밥을 접시에 담으며, 비록 재료는 단출하지만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만큼은 꽤 진지했다는 걸 스스로 느낀다. 삶이 대단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려주는, 가장 솔직한 한 끼.
냉장고 구석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김치는 익을 대로 익어 손으로 집어도 흐물흐물하다. 하지만 그런 묵은 재료가 때로는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다. 평소 같으면 외면했을 텐데, 기운이 없는 날엔 그 강한 향이 오히려 입맛을 깨운다. 매운 맛을 부드럽게 잡아주는 재료는 없다. 그냥 날것 그대로의 풍미를 감당해야 한다.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날 때, 자취방 작은 주방이 갑자기 살아난다. 고춧가루나 설탕, 간장 등을 넣어도 좋지만, 가끔은 최소한의 재료로 버텨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밥알 하나하나가 기름에 코팅되어 윤이 흐르고, 뜨거운 그릇에 옮겨 담으면 구수한 냄새가 밥보다 더 배를 채운다. 무기력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배가 차오르면 마음도 조금은 나아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가장 단순한 재료가 가장 깊은 위로를 주기도 한다.
부드러운 데다 가벼운 그리움
찬장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계란 한 알. 마음처럼 축 처져 있다가도, 흰자와 노른자를 가볍게 섞어 국물에 풀어 넣는 순간 따뜻한 기운이 일어난다. 기름 하나 없이 맑게 끓여낸 이 국은 특별한 향도, 자극도 없다. 그러나 그 담백함 안에 묘한 중독성이 있다. 조금의 소금, 조심스럽게 저은 국자 한 번, 간단해 보이지만 그 안엔 놀라울 만큼 많은 감정이 들어간다. 떠오르는 건 옛날 어린 시절의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아 국 한 숟갈을 떠넣었던 기억, 그 한입에 담긴 온기가 지금의 나에게로 전달된다. 계란이 풀리며 생기는 부드러운 물결은, 말보다 먼저 마음을 풀어주는 힘이 있다. 먹고 나면 특별한 향이 남는 것도 아니고 배가 무척 부른 것도 아닌데, 속이 편안하고 따뜻해진다. 그런 잔잔한 위로가 오늘의 공허를 채워준다.
뜨거운 물에 계란을 풀어 넣는 장면은 언제나 조용하다. 큰 소리 없이 국물이 뽀얗게 퍼지고, 그 안에서 흰자와 노른자가 조용히 섞여간다. 소금 대신 국간장을 살짝 넣어도 감칠맛이 더해진다. 물이 팔팔 끓는 게 아니라 은근하게 우는 듯 끓는 정도가 좋다. 이렇게 끓인 국은 자극적인 맛이 하나도 없지만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난다. 아마도 기억 속 어떤 장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양념이 없기에 속이 편하고, 하루 중 첫 끼로도 무리가 없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 국을 끓이는 순간, 냉기가 퍼진 집 안을 국물의 온도가 천천히 채워나가는 그 감각이 마음을 안정시킨다. 계란 하나만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고맙다. 무엇보다 만들면서도, 먹으면서도 복잡한 생각이 들지 않아 좋다. 머릿속이 비워지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음식이 된다.
짭조름하게 눌러 붙은 위로
입맛이 없을 때도 한입은 꼭 먹게 되는 반찬이 있다. 따로 조리법이 복잡하지도 않은데, 이상하리만치 손이 자주 간다. 얇게 썬 고기가 팬에 닿는 소리는 그 자체로 반가운 알림 같기도 하다. 냉장고에서 꺼낸 조각을 살짝 익혀내기만 해도, 고소함과 짠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밥 위에 하나 얹어 먹는 것만으로도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반찬이라기보단, 정서적인 존재에 가까운 음식. 바쁘거나 지친 날, 냄비를 꺼내기도 싫을 때 이 간단한 고기 조각이 모든 것을 대신해준다. 설탕 한 숟갈을 더하면 조금 부드러워지고, 케첩을 살짝 더하면 전혀 다른 느낌이 된다. 어쩌면 이 음식은 ‘귀찮음’을 감싸안는, 그런 기능을 가진지도 모른다. 한 끼를 억지로라도 챙기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을 살아낸다.
무심코 꺼낸 고기 한 조각이 밥 위에 올라가는 순간, 소박한 식사가 하나의 한 상차림이 된다. 따로 반찬을 차릴 필요 없이, 단 하나만으로도 밥을 부를 수 있는 맛이다. 기름에 살짝 튀듯이 구워진 표면은 소리 없이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짭조름하게 퍼지는 맛은 단순한 짠맛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오는 안도감 같은 것이다. 그리움은 때로 혀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식당에서 먹는 음식과는 다르게, 집에서 해 먹는 이 메뉴엔 손에 남는 기름기조차 위로처럼 느껴진다. 간단하지만 허전하지 않고, 익숙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케첩이나 마요네즈 한 줄만 곁들여도 느낌이 달라지고, 때로는 김치와 같이 먹으면 더없이 완벽한 조합이 된다. 혼자 있는 날, 말없이 밥을 먹는 데 이보다 좋은 친구는 없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이 반찬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