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없고 마음은 고픈 날 컵 안에 담긴 게으른 창의력
출근 시간은 다가오고, 배는 고프고, 손은 느리고, 마음은 그보다 더 느려진다. 이럴 때 컵 하나 꺼내놓고 물만 부으면 해결되는 식사로 위안받는다. 하지만 그저 끓인 물만 붓는 건 너무 허전하다. 가끔은 여기에 leftover 재료 하나씩을 얹어본다. 남은 치즈 한 조각, 잘게 자른 대파, 어제 먹다 남긴 닭가슴살 조각까지. 컵 안에서 이것들이 뒤섞이기 시작하면, 갑자기 허술했던 음식이 ‘한 그릇’이라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뚜껑을 열고 나면 향은 생각보다 풍성하고, 한입 떠먹을 때마다 '이거, 괜찮은데?' 싶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진짜 요리는 아니지만, 이 작은 컵 안에 나만의 조합이 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다. 대단한 레시피도, 멋진 플레이팅도 없지만, 나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로서 그릇 하나가 완성된다. 그렇게 아침이 조금은 부드럽게 시작된다.
누가 봐도 성의 없어 보이는 즉석식도, 손끝 하나 더 얹으면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된다. 컵에 든 음식 하나를 놓고 '어떻게든 더 나아지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이 있다. 그게 허기 때문인지, 허전함 때문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계란을 풀어 넣으면 국물이 더 부드러워지고, 잘게 썬 양파는 씹는 재미를 준다. 가끔은 아주 작은 고춧가루 한 꼬집이 음식의 온도를 바꿔놓기도 한다. 물을 정확한 선보다 조금 덜 붓는 것만으로도 면발이 더 탱탱해지고, 이 작은 차이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된다. 컵 하나 안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가 신기하다. 아무렇지 않게 시작한 끼니가 끝날 무렵엔 오히려 내가 이걸 챙겨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리 시간이 짧다고, 그 가치까지 가벼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소리 없이 녹아드는 포근함
밥 위에 치즈를 올리고, 달걀 하나를 톡 깨뜨려서 그 위에 조심스레 얹는다. 냉장고에 늘 있는 재료지만, 조합에 따라 이건 꽤 진지한 위로가 된다. 전자레인지에 몇 분 돌리는 동안 안쪽이 어떻게 익을지 상상하게 된다. 입안에 넣는 순간 치즈의 고소함과 계란의 부드러움이 퍼지면, 그동안 버티고 있던 감정이 조용히 풀어진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실패해도 큰일 나지 않는 점이 이 메뉴의 장점이다. 어떤 날은 간장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어떤 날은 후추를 더하거나 파를 올려보기도 한다. 조리 시간 5분도 안 되지만, 식사 시간이 끝날 즈음엔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건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라기보다, 말 없는 속내를 달래주는 한입에 더 가깝다. 먹고 나면 갑자기 움직일 힘이 생기고, 주방이 고요하게 다시 정돈된다. 마음속의 주름도 조금씩 펴진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몇십 초 동안, 나는 잠깐 멍하니 주방 벽을 본다. 밥 위에 치즈를 얹고 달걀을 더하는 과정은 몇 초밖에 안 걸리지만, 그 짧은 시간이 주는 안정감은 묘하다. 반짝이는 숟가락 위에 묻어 있는 치즈는 완벽하게 녹지도, 그렇다고 덩어리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장 맛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들고 자리에 앉으면, 세상 일이 다 멀게 느껴진다. 화려하지 않으니까 편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오늘따라 더 마음이 식었다 싶을 때, 이 부드럽고 고소한 조합은 딱 알맞은 위로가 된다. 먹는 속도를 조절하지 않아도 괜찮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어느 쪽이든 전부 어울린다. 다 먹고 나면 속이 포근해지고, 그 따뜻함이 서서히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 좋다. 단순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한 끼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짜면서도 허전하지 않은 한 모서리
라면 하나 끓이기에도 버거운 날, 그래도 식탁이 너무 단출해 보이는 건 싫다. 그럴 땐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곁들이 반찬이 필요하다. 냉장고 안에서 낡은 반찬통을 꺼내든, 계란을 또 하나 꺼내든, 심지어 김치 한 조각을 그릇에 옮겨 담기만 해도 식사의 인상이 바뀐다. 핵심은 ‘뭘 더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놓느냐’다. 어지럽게 퍼진 라면 옆에 작게 놓인 노란 단무지나 매콤한 오이무침 한 숟갈은, 전체 식사의 구성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이런 반찬은 주연이 아니지만, 없으면 아쉬운 배경처럼 늘 따라온다. 그래서 매번 같은 인스턴트 식사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집에서 먹는 밥처럼 느껴진다. 맛이 복잡할 필요도 없고, 많은 정성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한 끼를 대충 넘기지 않으려는 의지. 그 조용한 마음이 작은 반찬 하나로 전해진다.
바쁜 하루의 중간에 대충 끓여낸 라면 한 그릇. 허기를 채우긴 하지만 어쩐지 아쉽다. 그래서 꺼내는 건 언제나 그 곁의 조연들이다. 남은 깻잎무침 한 젓가락, 지난주 만들어둔 감자볶음이든 뭐든 좋다. 심지어는 냉동실에서 꺼낸 김치전 한 조각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서 곁들일 때도 있다. 이런 곁들이 음식은 눈으로 보기에도 안정감을 준다. 라면이라는 단순한 음식이 덜 초라해 보이고, 어쩐지 ‘내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반찬은 작지만 그 존재감은 꽤 크다. 하나씩 집어먹는 동안 식사의 리듬이 생기고, 혼자 먹는 시간이 갑자기 정돈된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 속엔 짠맛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결국은 음식 그 자체보다, 그걸 차리는 내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그 작은 정성이 바로 오늘의 공허를 메워주는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