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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없고 마음은 고픈 날의 부엌 풍경 창의력, 포근함, 모서리

by amange100 2025. 6. 12.

시간은 없고 마음은 고픈 날의 부엌 풍경
시간은 없고 마음은 고픈 날의 부엌 풍경

시간은 없고 마음은 고픈 날 컵 안에 담긴 게으른 창의력

출근 시간은 다가오고, 배는 고프고, 손은 느리고, 마음은 그보다 더 느려진다. 이럴 때 컵 하나 꺼내놓고 물만 부으면 해결되는 식사로 위안받는다. 하지만 그저 끓인 물만 붓는 건 너무 허전하다. 가끔은 여기에 leftover 재료 하나씩을 얹어본다. 남은 치즈 한 조각, 잘게 자른 대파, 어제 먹다 남긴 닭가슴살 조각까지. 컵 안에서 이것들이 뒤섞이기 시작하면, 갑자기 허술했던 음식이 ‘한 그릇’이라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뚜껑을 열고 나면 향은 생각보다 풍성하고, 한입 떠먹을 때마다 '이거, 괜찮은데?' 싶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진짜 요리는 아니지만, 이 작은 컵 안에 나만의 조합이 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다. 대단한 레시피도, 멋진 플레이팅도 없지만, 나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로서 그릇 하나가 완성된다. 그렇게 아침이 조금은 부드럽게 시작된다.

누가 봐도 성의 없어 보이는 즉석식도, 손끝 하나 더 얹으면 전혀 다른 결과물이 된다. 컵에 든 음식 하나를 놓고 '어떻게든 더 나아지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이 있다. 그게 허기 때문인지, 허전함 때문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계란을 풀어 넣으면 국물이 더 부드러워지고, 잘게 썬 양파는 씹는 재미를 준다. 가끔은 아주 작은 고춧가루 한 꼬집이 음식의 온도를 바꿔놓기도 한다. 물을 정확한 선보다 조금 덜 붓는 것만으로도 면발이 더 탱탱해지고, 이 작은 차이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된다. 컵 하나 안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가 신기하다. 아무렇지 않게 시작한 끼니가 끝날 무렵엔 오히려 내가 이걸 챙겨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리 시간이 짧다고, 그 가치까지 가벼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소리 없이 녹아드는 포근함

밥 위에 치즈를 올리고, 달걀 하나를 톡 깨뜨려서 그 위에 조심스레 얹는다. 냉장고에 늘 있는 재료지만, 조합에 따라 이건 꽤 진지한 위로가 된다. 전자레인지에 몇 분 돌리는 동안 안쪽이 어떻게 익을지 상상하게 된다. 입안에 넣는 순간 치즈의 고소함과 계란의 부드러움이 퍼지면, 그동안 버티고 있던 감정이 조용히 풀어진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실패해도 큰일 나지 않는 점이 이 메뉴의 장점이다. 어떤 날은 간장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어떤 날은 후추를 더하거나 파를 올려보기도 한다. 조리 시간 5분도 안 되지만, 식사 시간이 끝날 즈음엔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건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라기보다, 말 없는 속내를 달래주는 한입에 더 가깝다. 먹고 나면 갑자기 움직일 힘이 생기고, 주방이 고요하게 다시 정돈된다. 마음속의 주름도 조금씩 펴진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몇십 초 동안, 나는 잠깐 멍하니 주방 벽을 본다. 밥 위에 치즈를 얹고 달걀을 더하는 과정은 몇 초밖에 안 걸리지만, 그 짧은 시간이 주는 안정감은 묘하다. 반짝이는 숟가락 위에 묻어 있는 치즈는 완벽하게 녹지도, 그렇다고 덩어리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장 맛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들고 자리에 앉으면, 세상 일이 다 멀게 느껴진다. 화려하지 않으니까 편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오늘따라 더 마음이 식었다 싶을 때, 이 부드럽고 고소한 조합은 딱 알맞은 위로가 된다. 먹는 속도를 조절하지 않아도 괜찮다. 천천히, 또는 빠르게, 어느 쪽이든 전부 어울린다. 다 먹고 나면 속이 포근해지고, 그 따뜻함이 서서히 온몸에 퍼지는 기분이 좋다. 단순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한 끼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짜면서도 허전하지 않은 한 모서리

라면 하나 끓이기에도 버거운 날, 그래도 식탁이 너무 단출해 보이는 건 싫다. 그럴 땐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곁들이 반찬이 필요하다. 냉장고 안에서 낡은 반찬통을 꺼내든, 계란을 또 하나 꺼내든, 심지어 김치 한 조각을 그릇에 옮겨 담기만 해도 식사의 인상이 바뀐다. 핵심은 ‘뭘 더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놓느냐’다. 어지럽게 퍼진 라면 옆에 작게 놓인 노란 단무지나 매콤한 오이무침 한 숟갈은, 전체 식사의 구성을 단단하게 잡아준다. 이런 반찬은 주연이 아니지만, 없으면 아쉬운 배경처럼 늘 따라온다. 그래서 매번 같은 인스턴트 식사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집에서 먹는 밥처럼 느껴진다. 맛이 복잡할 필요도 없고, 많은 정성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한 끼를 대충 넘기지 않으려는 의지. 그 조용한 마음이 작은 반찬 하나로 전해진다.

바쁜 하루의 중간에 대충 끓여낸 라면 한 그릇. 허기를 채우긴 하지만 어쩐지 아쉽다. 그래서 꺼내는 건 언제나 그 곁의 조연들이다. 남은 깻잎무침 한 젓가락, 지난주 만들어둔 감자볶음이든 뭐든 좋다. 심지어는 냉동실에서 꺼낸 김치전 한 조각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서 곁들일 때도 있다. 이런 곁들이 음식은 눈으로 보기에도 안정감을 준다. 라면이라는 단순한 음식이 덜 초라해 보이고, 어쩐지 ‘내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기분까지 들게 만든다. 반찬은 작지만 그 존재감은 꽤 크다. 하나씩 집어먹는 동안 식사의 리듬이 생기고, 혼자 먹는 시간이 갑자기 정돈된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 속엔 짠맛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결국은 음식 그 자체보다, 그걸 차리는 내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그 작은 정성이 바로 오늘의 공허를 메워주는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