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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집밥 이야기 전의 온기, 하루의 위로, 깊은 풍미

by amange100 2025. 6. 9.

세 가지 집밥 이야기
세 가지 집밥 이야기

세 가지 집밥 이야기 비 오는 날 생각나는 바삭한 전의 온기

어릴 때부터 빗소리가 유독 좋았다. 창밖에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보면 문득 어떤 냄새가 머릿속을 스쳐간다. 고소하면서도 기름지지 않은, 딱 적당한 양의 바삭함이 입안을 감싸는 듯한 느낌. 바로 그날, 어머니가 부쳐주시던 전의 냄새다. 얇게 저민 감자를 물에 한 번 헹궈낸 뒤 전분을 모아 반죽 삼아 지글지글 부치면, 그 표면은 마치 레이스처럼 얇게 퍼지며 노릇노릇한 색을 띤다. 다 익었을 무렵, 뒤집는 타이밍 하나만으로도 그 맛이 좌우될 만큼 미묘한 순간의 연속이다. 그저 간단한 간장 소스 하나면 충분하다. 짭짤한 맛보다는, 감자의 고유한 단맛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어떤 날은 여기에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자극을 주고, 또 어떤 날은 애호박을 함께 넣어 부드러움을 더한다. 감자 하나로도 이렇게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이 참 묘하다. 만드는 사람의 손맛, 불 조절, 기름의 양,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단순한 음식도 특별해진다. 어쩌면 전이 주는 따뜻함은 맛보다 그 날의 기억,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더 크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날 따라 유난히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괜히 부엌 쪽으로 발길이 갔다. 감자 몇 개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강판에 갈다 보면 손끝이 아려온다. 그 느낌마저도 묘하게 좋다. 찬물에 헹궈낸 감자채를 살짝 짜내고 남은 전분을 가만히 모아두면, 그게 반죽의 바탕이 된다. 기름은 너무 많이 두르지 않는다. 적당히 얇게 퍼뜨려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나온다. 온도는 중불이 좋다. 세게 달궈놓으면 금방 타버리거든. 구워지는 동안 퍼지는 향은 마치 어린 시절 할머니 집 마루를 스치는 기분을 준다. 잠깐 멈춰서 숨을 들이마시고 싶어질 정도로 따뜻한 냄새다. 굳이 고급 재료 없이도 이렇게 풍성한 맛이 나온다는 게 신기하다. 남은 전은 다음 날 오븐에 살짝 데워도 바삭함이 살아난다. 어릴 적엔 이런 음식이 왜 맛있다는 건지 몰랐지만, 이제는 어쩌면 이게 가장 솔직한 한 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둘러 먹고 싶은 하루의 위로

지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저녁, 복잡한 조리과정보다는 빨리 한 그릇을 완성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러면서도 입안 가득 풍미가 퍼지는 그 위로는 놓치고 싶지 않다. 냉장고에 있던 참치캔을 꺼내고, 마요네즈 한 숟갈에 약간의 간장을 떨어뜨려 살살 섞는다. 여기에 다진 양파와 단무지를 살짝 더하면 단조로운 조합에 생기가 돈다. 뜨거운 밥 위에 그걸 얹고, 마지막으로 김가루와 깨소금을 솔솔 뿌린다. 한 입 떠 넣었을 때, 고소함과 짭짤함이 동시에 퍼지고, 마요네즈 특유의 부드러움이 감싸며 씹는 재미까지 살아있다. 이 조합은 단순하면서도 완성도가 높아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다. 특히 자취를 시작한 이들이 자주 찾는 레시피 중 하나로, 요리를 못 해도 실패할 일이 적다. 어떤 날은 여기에 반숙 계란프라이 하나만 올려도 완전히 다른 한 끼가 된다. 달걀노른자의 고소함이 참치의 짠맛을 부드럽게 감싸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한 끼를 가볍게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끝내 그릇을 깨끗이 비우게 되는 마법 같은 음식이다. 재료는 단순하지만, 그 속엔 오늘을 살아낸 사람의 피로가 녹아 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날, 현관문을 여는 순간부터 생각난다. 무언가 요리할 정신은 없지만 배는 고프고, 시켜 먹기엔 돈 아깝고. 이럴 땐 참치 한 캔이 고마운 존재가 된다. 밥 위에 그대로 얹으면 기름이 밥에 살짝 스며들면서 고소한 풍미가 도드라진다. 다진 양파는 한 번 찬물에 담가 매운맛을 빼주는 게 좋다. 단무지는 최대한 작게 썰어 넣어야 밸런스가 맞는다. 간장과 마요네즈는 비율을 잘 맞춰야 한다. 마요네즈가 너무 많으면 느끼해지고, 간장이 과하면 짜게만 느껴진다. 이때 김가루는 단순한 토핑이 아니라 전체 맛의 방향을 잡아준다. 마치 조용한 배경 음악처럼, 튀지 않지만 빠지면 허전한. 속이 허할 때 먹으면 진짜 위로가 된다. 이게 고급 음식도 아니고, 특별한 재료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먹고 나면 기분이 조금은 괜찮아진다. 밥 한 공기에 담긴 온기와 기름기, 그리고 작은 정성 하나하나가 이 음식을 다른 그 무엇보다 진심 어린 위로로 만든다.

평범한 식재료에 숨겨진 깊은 풍미

겉으로 보기엔 별다를 것 없는 보랏빛 채소. 대체 어디에 쓰면 좋을까 고민되기 마련이지만, 제대로 굽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가지를 세로로 얇게 썰고, 올리브유를 살짝 바른 뒤 팬이나 오븐에 구워본다. 처음엔 물이 많이 나오지만, 그걸 충분히 증발시키고 나면 가지 특유의 단맛이 드러난다. 구운 가지는 그 자체로도 맛있지만, 여기에 발사믹 글레이즈를 살짝 뿌리면 기분 좋은 새콤함이 더해진다. 다른 날엔 마늘과 파슬리를 섞은 올리브유 소스를 위에 올려 지중해 풍의 요리로 변신하기도 한다. 고기보다 포만감은 덜하지만, 그 부드러운 식감과 깊은 맛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식물성 재료만으로도 이렇게 진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건 놀랍다. 특별히 꾸미지 않았는데도 정갈하게 느껴지는 그 모습,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향은 조리하는 내내 기분을 차분하게 만든다. 고요한 주방에 바삭한 껍질이 팬에 닿는 소리가 은근한 위로가 되어 준다. 그래서 이 요리는 식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복잡하지 않아도, 과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을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존재다.

가지를 자를 때 특유의 스펀지 같은 느낌이 손에 닿으면, 괜히 제대로 조리해주고 싶어진다. 수분이 많은 식재료라 팬에 올리면 처음엔 눅눅해지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구우면 겉면이 서서히 색을 입으며 매끈하게 바뀐다. 간을 세게 하지 않아야 가지의 본맛이 살아난다. 소금만 살짝 뿌리거나, 다진 마늘을 올려도 된다. 굽는 과정에서 올리브유를 충분히 흡수하기 때문에 따로 많은 양념이 필요 없다. 가끔은 치즈를 얹어 그라탱처럼 굽기도 한다. 고소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할 때, 그 식감은 입 안에서 천천히 퍼진다. 흔한 채소지만 잘 조리하면 고기보다 더 풍성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채식 요리로도 손색 없고, 식단 조절 중인 사람들에게도 훌륭하다. 단순한 조리가 담백한 감성을 만들고, 그 안에 깊은 맛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맛은 결코 시끄럽지 않고, 아주 조용히 마음속까지 스며든다. 어쩌면 가장 미묘한 감동은 이렇게 평범한 식재료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