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한글을 지키려는 조용한 싸움
1930년대, 말과 글조차 빼앗기던 시대. 누군가는 총을 들고 싸웠고, 또 누군가는 연필 한 자루로 맞섰다. 말과 글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었다. 정체성이었고, 숨결이었다. 한 인쇄소에서 시작된 작은 움직임은 금서로 지정된 사전을 만들겠다는 거대한 꿈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위대한 영웅담보다는 소시민들의 꾸밈없는 노력에 집중한다. 주인공은 글조차 몰랐던 인물이고, 처음엔 사전이 뭔지도 몰랐지만 점점 그 속뜻을 깨닫게 된다. 배우 유해진의 담백한 연기와 유연한 감정선이 영화를 더욱 사람 냄새 나게 만든다. 감독 엄유나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인간적인 유머와 온기를 잃지 않으며,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울림을 전한다. 말은 빼앗겨도 마음만은 꺾이지 않던 사람들의 작고도 단단한 저항이 고스란히 화면에 담겨 있다.
일제 강점기, 말을 잃는다는 건 단지 단어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이름을 부를 수 없고, 감정을 제대로 전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시절에 누군가는 글자를 모으고, 단어를 적어 내려가는 일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그건 소리 없는 저항이자 가장 치열한 방식의 독립운동이었다. 영화는 이 과정을 거창하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소소하고 투박한 인물들을 따라가며, 그들의 손끝에 담긴 진심을 보여준다. 말 하나를 수집하는 일이 곧 기억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관객도 차츰 깨닫게 된다. 유해진이 연기한 인물의 변화는 그 시대 수많은 이들의 각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풀어낸 연출이 특히 인상적이다.
사전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
누군가에겐 당연한 언어지만,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생명의 끈이었다. 단어 하나를 모으기 위해 전국을 누비고, 어르신들에게 말뜻을 묻고, 밤새 기록을 정리하는 과정은 단순한 문서작업이 아니었다. 말모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작업은 기억을 담는 일이었다. 사라져가는 순우리말 하나하나에 그 시대 사람들의 숨결이 있었고, 삶이 있었다. 사전은 단순한 책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었다. 이 영화는 그 지점에 천착한다. 화려한 액션도, 거창한 명대사도 없다. 하지만 단어 하나를 놓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진심 어린 대화 속에 감정의 진폭이 담긴다. 사전은 단순한 종이뭉치가 아니라, 말이라는 이름의 독립선언문이었던 셈이다. 그들의 사소하고도 위대한 작업은 지금 우리의 일상 속 말에 그대로 살아 있다.
사전이란 단어를 나열한 책이 아니라, 민중의 삶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각 지방의 방언, 사라져가는 단어들, 누군가는 더 이상 쓰지 않는 말까지, 모두 그 시대의 생활과 정신을 반영한다. 그 언어를 수집하고 정리한다는 건 단순히 학술적인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을 모아내며, 나아가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과정이었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도 없었다. 지식인이든 문맹이든, 말을 아끼지 않고 건네는 순간 모두가 주체가 되었다. 이는 말이라는 것이 결코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래서 이 작업은 책 한 권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합이 남긴 자취가 된다.
사람과 말, 그리고 남겨진 것들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말로 표현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진하게 다가온다. ‘말을 지킨다’는 건 곧 사람을 지킨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 사전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과 아픔을 품고 있지만, 서로의 말과 손길을 통해 조금씩 위로받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인물 간의 소통과 정서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인물들을 카메라 한가운데 두기보다는 그들이 주고받는 말 사이에 서서 그 틈을 섬세히 비춘다. 종종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침묵 속에 감정이 깊게 배어 있고, 그것이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한 인물도 있지만, 그의 목소리는 남아 있다. 누군가의 말은 그 자체로 삶의 흔적이며,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조용히 일러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사전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건, 그 단어들이 어떤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 애정, 연대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함께 모인 이들이 처음부터 같은 방향을 바라본 건 아니다. 때로는 좌절하고, 서로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해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그들을 이어주는 건 말이었다. 짧은 대사, 사소한 표현들이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긴다. 침묵의 순간조차도 감정을 더 짙게 한다. 그렇게 영화는, 사전이라는 결과보다 그 속에 담긴 마음들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우리가 지금 쓰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되돌아보게 만든다.